‘ 나의 청소년기 태권도 수련 이력 ’

 

본인의 태권도 수련 이력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난 한결 같이 내 동생들이 스승이라고 하고 나 스스로 태권도를 터득(?)했다고 한다. 그런 대답에 족보도 없는 태권도를 수련을 했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대단하다고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나는 분명히 한다. 나름 독자적으로 태권도를 수련했고 나만의 태권도(무도)를 갖추고 있다고.  지금 공개하는 내용은 논픽션(nonfiction)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수련한 태권도 수련 이력이다.

 

나의 태권도 수련은 1973년도에 서울 광진구 자양3동에 있는 자양초등학교 태권도부에서 작되었다. 그 당시 본인의 형제는 4남매의 전형적인 가족구성이었는데 셋째, 넷째 남동생들(초등2, 3학년)이 학교 태권도부에서 수련을 했다.

 

그러던 중 동생들을 마중하러 학교에 가는 과정에서 창문 너머로 태권도 수련하는 것을 보게되고 자연스럽게 창문 너머로 동작을 따라 하게 됨과 동시에 동생들 수련이 끝난 후 집에 돌와오면 동생들에게 동작을 하나씩 전수 받았다.

 

그러면서 시간이 날 때 마다 동생들이 태권도 수련을 하는 학교를 찾았고 그런 시간이 약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복도에서 혼자 동작 흉내를 내고 있는 나를 동생들을 지도하던 사범님(이진묵-아주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감)이 부르더니 동작을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 때 어깨 너머로 배운 태권도 동작 시연을 처음으로 했는데 사범님께서 태권도 수련정도가 상당히 깊다고 칭찬을 하시고는 동생들을 포함한 초등학생 수련생 40여명의 통제를 간간히 맡겨 주었다.

 

즉 교사로 발탁이 된 것이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사범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관장님, 사범님 그리고 바로 그 밑에 태권도 수련을 봐주는 교사란 직책의 지도사범이 있었다.

 

1단(초단) 승단은 1973년 청도관 본관 자체 승단 심사로 1단을 획득하였다. 당시는 국기원 심사가 아닌 각 계열관 본관 심사를 거쳐 승단을 하는 때였다.

 

지금처럼 승단 년한이 경과 되어야 승단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인정되면 본관심사를 거쳐서 단을 부여했다. 그러한 승단심사는 1971년을 기준으로 국기원 심사 체제로 일원화되었다.

 

이듬해인 1974년에 2단에 승단했고 3단은 정도관으로 관을 옮겨서 승단을 했다. 관을 옴긴 이유는 이진묵 사범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관계로 자양3동 학교 근처에 있던 태권도장을 찾았는데 그 태권도장이 정도관 소속으로 지금의 건국대 후문에 있던 정도관 제8관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도관으로 관이 바뀌었다.

 

4단은 특전사(5여단)에서 획득하고 사범자격은 1981년 제대를 하고 청호체육관을 개관하면서 취득을 하고 그 이후로 국기원 승단규정에 의해 5, 6, 7, 8, 9단을 승단하여 현재 9단의 무력을 갖추고 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태권도장을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가 수련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실제로 동네 도장의 수련생들은 그 지역에서 건달끼(깡패)가 있는 20대의 성인 수련생이 대부분이었고 또 철저하게 교사 또는 선배 수련생들에 의해서 신규 수련생들의 수련이 전수(통제)되던 시절이었다.

 

새롭게 입관한 동네 태권도장에서 처음으로 나이가 나보다 많은 수련생과 수련을 하게 되었는데 일종의 도장의 텃세란 것이 있던 시기로 특히 처음 태권도를 입문하는 수련생이 아닌 타 관 수련생들은 실력에 상관없이 일단은 시험을 통과해야 했던 시절이다.

 

나 역시 그런 관행에 입각해서 입관한 날 겨루기를 했는데 처음에는 수련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수련생과 겨루기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막 1단에 승단한 수련생이었다.

 

결과는 보기 좋게 KO을 시켰고 그러자 교사라는 지도 사범이 직접 본인과 겨루기를 했고 그 교사도 들어찍기 한방에 KO가 되는 상황이 입관일 당일 일어난 입관식(?)이었다.

 

그 일로 해서 태권도 수련이 수월하기는 했는데 문제가 다른 곳에서 생겼다. 처음에 KO를 당한 수련생이 바로 도장이 있는 자양3동에 사는 수련생인지라 어떻게 해서든지 앙갚음을 하려고 벼르는 것이었다.

 

도장에서는 실력으로 대결이 되지 않으니까 수련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공동묘지에서 항상 동네 친구들과 패거리를 이루어 앙갚음을 하려고 했다.

 

교사 또한 도장의 선배로서 드러내놓고는 못했지만 항상 본인에게 겨루기 과정에서의 수모를 되돌려 주려고 벼르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수련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2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고등학교에 입학을 함과 동시에 동네 태권도장에서 고등학교(영동) 태권도부(특별활동)로 옮겨서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에서도 바로 1년 선배들이 자기들보다 실력이 뛰어나니까 단체로 괴롭힘을 주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학교 생활부(규율부)와 연계된 선배들과 맞서는 교내 패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선배 한명을 반 불구로 만드는 사건을 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학교가 발칵 뒤집히는 일에 연류돼 징계(퇴학)를 받을 뻔했으나 담임선생님의 중재로 없었던 일로 서로 부모들 간에 합의가 되어 학교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고3 졸업을 하고 졸업을 함과 동시에 졸업생으로서 특별활동부를 방과 후에 지도(후배들 수련지도)을 하게 되는데 그 당시 월 심사비로 1인당 3,000원의 심사비를 받았다.

 

당시 후배 수련생들은 70여명으로 받은 심사비는 모두 본인의 지도료로 본인이 챙겼는데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엄청난 금액으로 그 심사비를 체육주임 교사가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구해 그만두고(1년8개월) 바로 특전사에 지원 입대를 했다.

 

특전사 지원 입대는 미국에 이민간 이정섭이란 친구의 꼬드김(?)에 의해서 하게 되는데 이정섭이란 친구와는 고등학교 시절에 규율부(생활부)에서 우두머리 역활을 하는 관계로 서로 라이벌 관계였으나 졸업 무렴 가까워지기 시작해서 군대도 같이 가고 제대 후에도 상당기간 돈독히 지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관계로 만나지 못하는 친구다.

 

그런데 이 친구와의 관계에서 태권도를 지금까지 계속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졸업 직전에 여학생들과 둘씩 짝이 되어 여주 신륵사로 야영을 갔고 그 야영에 같이했던 한 여학생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는데 그 친구(연인) 사이가 되는 계기도 역시 태권도와 관련이 있다.

 

그 관련은 다음과 같다. 여주시내에 도착하여 가계에서 맥주와 간식거리를 사고 야영지인 강변 모레사장 쪽으로 걸어서 이동을 하는데 그 당시 관광지에서는 으레히 청소년들의 텃세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강촌, 대성리등 대학생들이 미팅을 가는 장소에서 놀러온 팀과 그곳의 마을 토박이 청년들간의 이유 없는 대립으로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후에 안 일이지만 우리나라 깡패 근원지 중에 하나가 여주시내였다.

 

여주에서의 사건은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동네 청년들과의 문제로 시작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끈질기게 추근덕거리고 특히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상황으로 이어져 더는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되어서인지 아님 우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인지 여주시내에서 그냥 돌려차기를 한 청년한테 날려 KO를 시켰다. 그것도 바로 파출소 앞에서...

 

근대 그 당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도 지금처럼 폭력전과로 바로 잡혀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거의가 훈방조치를 하곤했다. 아마도 사회적으로 청년들의 일상생활을 시국이란 상황 때문에 통제를 과도하게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문제가 일단락되는가 했는데 밤에 모레사장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데 12시가 넘어서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일행 4명은 서로 두 팀으로 나누어져서 얼큰하게 맥주도 한잔하고 그 당시 유행하던 모닥불을 피워놓고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설치해 놓은 텐트가 송두리째 모레사장 위로 미끌어지듯이 끌려가는 것이었다.

 

낯에 KO를 당한 친구들 서너명이 몽둥이를 들고 와서는 해코지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나는 술이 세었던 것 같다. 이정섭이란 친구는 원래 술을 많이 못했고 여학생들도 여학생인지라 맥주 서너잔에 이미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고 본인 혼자서 대처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남자들답게 너희들 중의 대표와 내가 1:1 결투를 해서 너희가 지면 조용히 우리들이 놀다가 갈수 있도록 이 시간 이후에 귀찮게 하지 않도록 하고 내가 지면 우리가 가지고온 모든 야영도구와 맥주 1박스를 주겠다고 했더니 좋다고 제안을 받아드려 한밤중에 영화에 나올법한 여주강변 모레사장에서 말죽거리 잔혹사(결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동네에 있는 청소년들은 나름대로 싸움을 해 봤다고 했으나 나 역시 태권도를 상당히 심도있게 했다. 당시 내 별칭이 이소룡을 빗댄 신소룡이었다. 또 한 굵직한 싸움을 주기적으로 해봐서 실전에 상당히 강한 상황이었다.

 

시쳇말로 잽이 안되는 상황으로 결투(?)가 끝이 났고 그 인연으로 그들과 밤새 꼭지가 돌도록 소주를 먹었는데 그 상황에서 내 짝이었던 여학생이 나에게 반해서 즉석에서 연인 선서식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야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18살 혈기 왕성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문제는 그 여학생은 대학교를 가기 위한 시험 공부를 집안에서 너무 철저히 시키는 상황이었고 나 역시 어머니가 공부이외에는 허락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별 아닌 이별을 해야 하는 고통을 처음으로 가슴에 묻었다.

 

그런 와중에서 그 여학생은 대학교를 가고 난 반발심만을 키워 결국은 대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졸업과 동시에 방황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1년여 동안 나를 지탱해준 것이 태권도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하지 않고 히피족처럼 생활을 하면서도 유독 태권도장에서 빽을 차면 모든 것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여주에서 태권도로 인해서 여학생과의 연인(?)의 관계가 맺어진 것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어서였던것 같다.

 

태권도를 하므로 내가 얻은 혜택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태권도를 하므로 내가 얻은 것은 정의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정의”란 단어가 갖는 보편적인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고 60이 넘은 지금도 모든 생활에서 ‘정의’ ‘옮고 그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몸에 베어있고 실천을 하고있다.

 

약자를 돕는 것과 정의롭지 못한 일에는 참지 못하고 나서는 것이 내 성격인데 이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태권도 수련을 통해서 내 몸에 베어있는 신념은 “옳지 않는 일은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권도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다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용의 도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삶의 철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고귀한 무도라고 생각한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