謀攻篇(모공편) 17강 “후퇴도 전략이다”

 

 

여러분과 같이 손자병법을 토파(공부)하고 있는 “신성환 관장”입니다. 16부 “진정한 승리”에 이어 17부 “후퇴도 전략이다”에 대해 각론 합니다.

 

손자병법 총 13편 중 세 번째 편인 ‘謀攻篇’에 대해서 각론하고 있습니다. 모공편 중 ‘후퇴도 전략이다’로 총 44편 각론 중 열일곱 번째 각론입니다.

 

손자병법의 영원한 주제는 뭘까요? 아마 그것은 어떻게 승리하느냐가 가장 큰 화두일 것입니다.

 

손자병법에서 강조하는 승리 개념은 A라고 하는 집단과 B라고 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 두 집단이 서로 충돌해 누군가 이겨야 되는데 내가 소속된 집단이 A고 상대방이 소속된 집단 B란 말입니다.

 

두 집단이 이제 싸워서(충돌) 이겨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과연 내가 속한 집단이 상대방 집단보다 얼마만큼의 힘을 갖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해되시죠? 내가 얼마만큼의 힘을 갖고 있는가? 과연 싸워서 내가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손자는 그 상황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분석을 하라고 합니다. 상대방과 나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식량은 어떻게 조달 할 것인지, 앞에서 각론한 지도자와 장군의 리더십, 지형적 조건 등 상대와 내가 싸우는 상황을 끊임없이 비교해 대비(준비)를 하라고 하고 그 것을 지피지기라고 하였습니다.

 

손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열 배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상대방과 나의 상황을 지피지기를 해보니까 내가 상대방보다 10배의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상대방하고 싸우는데 여러분의 힘이 10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가서 그냥 바로 공격할 것입니까? 손자는 말합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10배의 힘이 있으면 十則圍之(십칙위지)하라고 합니다. 圍(위) 자는 포위할 위입니다.

 

필자는 ‘십칙위지’하라는 것을 보고 깜작 놀랐습니다. ‘지피지기’ 해보니까 내가 상대방 보다 10배의 힘이 있으니까 그냥 공격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손자병법에서는 10배의 힘이 있으면 공격하지 말고 포위를 하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힘이 상대방 보다 10배라고 하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10배 힘이 있는데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포위하라고 합니다.

 

포위한다는 것이 뭐예요. 포위 한다는 것은 둥그렇게 모여서서 둘러싼다는 것 아닙니까? 무두질이란 말 들어 보셨습니까? 무두질이란 소가죽을 사용할 수 있도록 손질하는 것으로 옛날 사회에 소를 한 마리 잡았습니다.

 

그러면 소가죽을 벗겨낼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벗겨낸 가죽을 말려서 부드럽게 해야 하는 데 그냥 말리면 소가죽이 어떻게 돼요? 동그랗게 말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 사람이 삥 둘러서서 한 쪽 귀퉁이를 잡고 당겨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가죽이 팽팽하게 펴지지 않겠습니까? 포위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소가죽이 펴질 수 있도록 삥 둘러서서 기다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손자 의 기본 생각은 내가 아무리 힘이 강하더라도 상대방을 때리면 내 손을 다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괜히 공격해 다치지 말고 삥 둘러서서 가죽 펴듯이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것을 보고 정말 놀라운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웬만하면 공격하라고 할 텐데 포위해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손자의 기본 사상이 뭐예요? 승리를 하는 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뭐라고 했습니까? 나도 상대방도 안 다치고 온전하게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 하지 않습니까?

 

승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는 승리가 중요하다고 해요? 싸우지 않고 하는 승리 즉 부전승을 강조하잖습니까? 손자병법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안 다치고 싸우지 않고 이긴 승리가 진정한 승리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보다 내가 10배 더 강해도 공격하지 말고 둘러서서 기다리라 합니다. 기다린다는 것, 사실 기다린다는 것은 강자만이 할 수 있는 여유입니다. 약한 사람은 못 기다립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데도 삥 둘러서서 상대가 스스로 무릎을 꿇을 때 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강자로서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손자병법을 해석한 주석을 보면 적의 城이 있습니다. 그 성을 공격하기 전에 성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기다려도 바로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스스로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기다리라고 합니다.

 

굉장히 지혜로운 사유입니다. 내 힘이 강할 때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그다음으로 손자는 말합니다. 五則攻之(오칙공지), 내가 적보다 힘이 5배일 때는 공격을 하라고 합니다.

 

한문이라는 문자는 굉장한 묘미가 있습니다. 한문 한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전체 문장이 뜻하는 바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논어는 1편부터 20편으로 돼 있습니다.

 

그중 10번째 편을 鄕黨篇(향단편)이라고 있는데 그 편 본문에 보면 공자라는 분이 어떻게 식사를 하셨고 어떤 걸 좋아하셨고 잠은 어떻게 주무셨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들 먹는 음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니까 공자의 식생활 습관을 여섯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공자님은 식사를 하실 때 색악이면 불식하셨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색깔이 별로 안 좋으면 드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음식 색깔이 이상하면 절대로 안 드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냄새가 안 좋으면 안 드셨다고 합니다. 이상한 냄새나는 건 안 드셨던 모양입니다. 굉장히 깔끔하신 분입니다. 식사에 있어서 아주 깔끔함을 갖고 계셨습니다.

 

세 번째는 음식이 익는 시기를 잃어버리면 안 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설익은 것도 안 드셨고 너무 푹 익어도 안 드셨던 것입니다. 밥 드실 때 밥이 약간만 설어도 밥 다시해오라고 아주 까탈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네 번째가 제때(계절)에 나온 음식이 아니면 안 드셨다고 합니다. 이것 배워야 합니다. 겨울에 딸기, 참외 이런 제철 과일이 아닌 것 드실 생각하지 마세요. 억지로 키운 것입니다. 제철 음식이 아니면 안 드셨던 것입니다. 안 드신 것이 많았습니다.

 

다섯 번째로 음식(재료)을 자른 것이 바르게 자르지 않으셨으면 안 드셨습니다. 깍두기에 있어서 자른 무가 정방형으로 잘라진 것이 아니라 삐뚤삐뚤 잘라진 것은 안 드셨습니다.

 

여섯 번째는 아주 재밌는 것으로 음식(요리)에 맞는 간장(소스)이 없으면 안 드셨습니다. 돼지 족발에는 뭐가 있어야 합니까? 새우젓 양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고추장을 찍어 먹으면 영 맛이 나지 않잖습니까? 음식에 맞는 소스가 없으면 절대로 드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공자가 살던 곡부라고 곳에 가면 ‘공부연’이라고 공자께서 드시던 음식 그대로를 요리해 관광 상품으로 파는 음식점이 있다고 합니다. 음식마다 소스가 따로 있고 자른 것이  아주 방정하게 자른 것이며 제철(때)에 맞는 음식 익힌 정도 냄새 색깔 등 당시 공자가 드셨던 그대로 갖춰진 음식상을 관광 상품으로 판다고 합니다.

 

뭐 2500년 전 음식이 남아 있겠습니까? 관광 상품으로 모방해 파는 것이죠. 필자가 지금 공자라고 하는 분의 식생활 습관을 쭉 이야기했습니다. 한문은 쓰여 진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뜻이 전혀 달라진다고 공자의 식생활 습관을 말하기 전에 말했습니다.

 

그 말에 대해서 더 부연을 하겠습니다. 공자라고 하는 분이 술을 얼마나 드셨는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공자께서는 술을 엄청 많이 드셨던 것 같습니다.

 

술을 드시는 것과 관련하여 오직 ‘유’ 자에 술 ‘주’ 자에 없을 ‘무’ 자에 헤아릴 ‘량’ 자와 아니 ‘불’ 자와 어지러울 ‘난’ 자를 써서 ‘유주무량불급난’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제대로 자르지 않은 것은 안 드셨고, 때가 아닌 것도 안 드셨고, 음식에 어울리는 장(소스)이 없으면 안 드셨다고 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공자께서 술을 드셨는데 어떻게 드셨느냐면 한 없이 드셨다고 합니다. 무량이란 것이 뭐예요? 끝도 없이 드셨대요. 끝도 없이 드셨는데 불금난이라 아니 불자에 미칠 급자에 어지러울 난자로 어디에 미치지(도달) 않으셨대요.

 

난리에 미치진 않으셨대요. 그러니까 술을 아무리 한(많이) 없이 드셨어도 난리 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공자께서 술을 드심에 말술을 드셔도 똑바로 앉아서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드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 가만히 보니까 공자가 너무 재미없는 분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나 필자는 여기서 소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유주무량불급난’ 이란 문장에서 소를 ‘유주무량불급’이면 ‘난’ 하셨다고 소를 끊으면,

 

술을 드심에 한량없이 드셨는데 양에 미치지 않으면 난리를 치셨다. ‘불급’이면 난 하셨다가 됩니다. 전혀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해석은 공자께서 술을 한없이 드셔도 절대 난리는 안 치셨다가 ‘소’를  ‘불급’이면 ‘난’하셨다고 끊으면 양에 미치지 못했으면 자로야 술 더 사와 하고 난리를 치셨다가 되는 것 입니다.

 

어떤 공자가 더 좋습니까? 술 먹고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공자가 좋아요? 아니면 술 먹고 약간 난리치는 공자가 좋아요? 필자는 두 번째가 더 좋습니다. 난리를 치는 공자가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술을 먹으면 깽 판치는 난리는 아니더라도 기분이 좋아서 흥청거리는 그런 공자가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술 먹고도 안 먹은 척 하는 그러한 성인 도덕군자가 아니라 술 먹고, 야 술 한 잔 더 갖고 와라고 하는 인간다운 공자!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공자지 도덕적인 공자가 필요한 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설명한 말이 무슨 말이냐면 글자 하나하나에 따라서 전달되는 내용(의미)이 다르다는 것으로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에 맞게끔 옷을 새로 바꿔 입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전의 힘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고전이라는 것이, 만약에 필자가 손자병법을 토파하면서 글자를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즉 상대방보다 열 배의 힘이 되면 둘러싸고 포위한다는 것을 문장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 시대에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손자라고 하는 사람이 2500년 전 ‘합려’라고 하는 오나라 왕한테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던 내용을 지금 필자가 그것을 보고 2500년의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느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해석(토파)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석한 내용이 누구에게로 전이가 되어요. 바로 여러분들한테로 가잖습니까? 여러분한테 전이된 필자의 느낌(해석)이 여러분이 살아온 경륜과 경험 속에서 또 다시 재해석이 된단 말입니다.

 

결국 필자는 손자병법을 강의하면서 손자가 이런 전쟁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손자가 주장하는 것을 필자는 이렇게 봤다. 이해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각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주장(해석)하는 것을 들은 여러분들은 여러분대로 각자의 삶(인생) 속에서 손자병법이 이렇게 들어왔다고 또 다시 해석(받아드리는 것)하는 것이 손자병법을 각론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고전을 공부할 때 항상 이 점을 놓치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문 번역이라고 하는 것, 결국 고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 당시(때)를 산 그 사람들의 느낌과 그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손자는 물론 공자와 주자에 대해서 공부한다는 것을 한번 생각(이해)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 힘이 적보다 5배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분석을 해봐야 한다고 손자는 말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상대방 보다 다섯 배 힘이 있으면 공격을 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적보다 5섯 배의 힘이 있다고 그 5섯 배의 힘을 다 써서 공격을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몇 개는 남겨놔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백만 원 있다고 합시다. 100만원이 있다고 다 쓰면 안 됩니다.

 

3분의 2는 쓰고 3분 1은 남겨 놔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은 100만원이 있으니 쓰는데 문제가 없지만 그 돈을 지금 기준으로 좋다고 다 써버리고 나면 결국은 어느 시점에 빈털터리가 될 것입니다. 그때는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돈이 하나도 안 남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3분의 1정도는 남겨놔야 된단 말입니다. 손자는 그래서 5배의 힘이 있으면 3배의 힘으로 공격을 하고 2배의 힘은 남겨 두라고 하며 3배의 힘도 모두 직접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셋 중 2개는 직접공격을 하고 1개는 측면 공격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환상의 공격은 다섯 개 중에 두 개는 남기고 세 개로 공격하는데 셋 중에서도 두 개는 직접 공격을 하고 한 개는 측면 공격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많은 주석가들은 해석을 합니다.

 

손자는 내 힘이 적보다 열 배, 다섯 배, 그 다음으로 두 배가 되면 분지하라고 합니다. ‘分枝’하라.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分’은 나눈다는 말입니다. 내가 적보다 두 배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누라고 합니다.

 

누구를 나누라고 하는 것입니까? 나를 나누라는 것인가요? 적을 둘로 분산시키란 것입니까? 손자는 적이 아니라 나를 나누라고 합니다.

 

나누는 주체에 대한 주석가들 해석은 논란이 많습니다. 과연 나누는 주체가 누구냐? 내가 두 배 힘이 있고 적은 상대적으로 하나의 힘이라고 보면 적을 분산을 시켜서 이쪽을 공격하고 저쪽을 공격하고 해서 물리친다고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나누는 주체로 나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하나는 정병으로 정면 돌파를 또 하나는 측면 돌파를 위한 기병으로 나누라고 손자는 주장합니다. 적을 공격할 때는 항상 원칙과 변칙을 써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손자의 기본적인 공격 전술 전략입니다. 그 다음으로 주장하는 것은 적과 내가 힘(전력)이 비등하면 싸울 수도 있고 안 싸울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자무적’ 이란 말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 어진 사람은 적이 없습니까? 무적이란 것을 적이 없다고 해석하면은 안된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적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는데 있어서 여기저기 모든 일에 비위를 맞추고 살면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삶은 동네 반장 아줌마일 때는 그래야 합니다. 적이 없어야 되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누구한테나 환영받는다는 건 그것은 문제가 있어도 보통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잘못된 일에도 가담하고 자기주장은 없고, 소위 부하뇌동하며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래도 흥 저래도 흥하는 하는 것, 이거 정말 문제가 많아도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을 당당하게 사는 사람은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색깔 없이 아부하며 사는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사회에 적응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는데 필자는 그리 보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당당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으로 우리는 사는데 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 태권도계 조직에서 그렇게 간 쓸게 없이 조직 핵심 임원에게 빌부터 생활하는 사람은 태권도인이라 할 수 없는데 태권도 태동이후 지금까지 태권도계 조직은 간 쓸개 없이 아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조직의 주류로 자리 잡고 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논조가 잠시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은 당당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럼 ‘仁者無敵’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인자무적’ 인을 소유한 사람은 적이 없다가 아니라, 적이나 어떤 세력, 힘 따위와 맞서 겨룸에 있어 상대할 즉 대적(對敵)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그 사람을 적으로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해석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적할 사람이 없는 것은 왜 대적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까? 당당하니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봐서 누구한테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니까 다 덤벼라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손자병법 문장으로 돌아와서 해석을 하면 적을 대적하는데 있어 상대방과 나의 전력이 대적할만하다면 다시 말해서 비등비등하다면 즉 서로가 대적(상대)할 만하면 그때는 싸우긴 싸우는데 ‘能’자가 안 들어있습니다.

 

‘능’이라 함은 영어로 말하면 조동사 can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힘이 비등비등하다면 안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한문 하나하나를 쫓아(따져)가는 것도 굉장히 재밌습니다.

 

내 힘이 상대방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해서 기다려라. 그게 강자의 여유다. 다섯 배가 됐을 때는 분산시켜서 공격해라. 두 배가 되면 기병과 정병을 써라. 적과 내가 실력이 비등비등할 때는 뭐 할 수도 있어요? 싸울 수도 있고 안 싸울 수도 있다.

 

여기서 안 싸울 수도 있다는 말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힘이 비등비등하면 싸울 수도 안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요? 적하고 나하고 비슷하니까 괜히 잘못 달려들었다가는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눈치)을 보니 비등비등하니까 안 싸워야겠다. 살짝 물러나도 된다는 것입니다. 살짝 물러나서 적과 나의 전력을 비교한 지피지기의 결과로 나의 다음 행동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적보다 내가 처한 상황이 안 좋을 때는 도망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망 잘 가야 됩니다. 도망 못 가고 붙는(싸우는) 사람은요 필자가 볼 때는 현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적과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 판단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망가야 합니다. 도망가는 것과 피하는 것은 전혀 틀립니다.

 

도피한다고 합니다. 渡와 避는 엄연히 틀립니다. 도는 작전상 약간 후퇴하는 것입니다. 피는 뒤도 안 돌아보고 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터에서 군사를 한 10 리 뒤로 물렸다. 이건 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예 철군을 해서 돌아가는 것은 피한 것입니다. 도피해버린 것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읽어야)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주석(해석)에 있어서 ‘伏’을 엎드린다로 해석합니다.

 

엎드린단 말이 뭐예요? 상대에게 내가 도저히 안 될 거 같다면 엎드리란 것입니다. 엎드려서 뭐를 해요. 잠을 자요 아니죠 엎드려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뭘 기다려요 적과 내가 대등하게 싸울 기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힘을 보강시키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적보다 힘이 약하니까! 잠깐 나를 낮춰서 내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힘이 적보다 월등히 나아졌을 때 그리고 적의 힘이 빠졌을 때 그때 다시 내 힘이 두 배가 되고 다섯 배로 높아졌을 때 그때 공격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엎드린다는 것은 도망간다는 것으로 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잠시 쉬는 것입니다. 쉬면서 잠시 엎드려서 나의 힘(공격력)을 보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내가 상대방보다 힘이 약해서 상대가 안 될 때는 유감없이 피해야 됩니다.

 

고사성어 중에 ‘주졸보차’란 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장기를 두실 때 많은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졸을 버리고 차를 보호한다. 장기를 둘 때 졸도 중요하고 차도 중요합니다. 다 살리고 싶죠 졸과 차 모두 우리 편이지만 상대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도저히 내가 상대가 안 돼서 엎드려야 할 때, 도망가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감하게 졸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인정이 그런 것이 아니다.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우리 병사들을 어떻게 버리는가라고 버티면 부대 전체가 무너지고 망하는 길입니다.

 

손자병법을 토파하다 보면 아주 냉혹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측면도 있지만 결국  조직(군대)을 살리기 위해서는 차(장군)를 살려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졸을 버리고(희생) 차(장군)을 보호(살려)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눈물을 머금고 버릴 수 있는 그런 장군의 결단이 있어야지 만약에 장군이 인정에 약해 졸도 보호하고 차도 보호하고 다 보호하려다가는 어떻게 됩니까? 부대가 완전히 몰살되는 경우가 굉장히 만치 않습니까?

 

그래서 ‘주절보차’ 졸을 버리고 차를 보호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가끔 음식점에서 맛있는 반찬 나올 때 있잖습니까? 맛있어서 더 달라고 하면 주인이 눈을 흘길 때가 있잖습니까? 그 음식점 절대로 성공 못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음식점 주인이 음식을 아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손해 볼 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라고 하면 밝은 표정으로 갖다 주는 것입니다. 반찬값 이것저것 따져서 더 못 주겠다고 하면 그 음식집 성공 못합니다.

 

훌륭한 상인은요 샘플을 아끼면 안 됩니다. 샘플을 뿌려야 진짜 내 물건을 팔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은 손해 보는듯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더 달라고 할 때 흔쾌히 더 내 주는 것이 결국은 되돌아오는(성공) 것입니다.

 

그래서 버릴 줄도 알아야 됩니다. 뭘 위해서요? 더 큰 이익을 위해서는 버릴 줄도 아는 것 그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손자는 이렇듯 여러 방법으로 상대와 내가 갖고 있는 힘을 비교해서 대처를 하라고 주장하면서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도저히 상대와 안 될 것 같으면 완전히 철군해 돌아가 역량(힘)을 다시 기르라고 합니다. ‘臥薪嘗膽(와신상담)’이란 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와신상담, 불편한 장작위에 몸을 눕히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거나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신’자는 땔나무 신자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눕는다는 말입니까? 땔나무에 누워 보셨습니까? 아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상’은 맛볼 상자입니다. ‘담’은 쓸개 담입니다.

 

땔나무(장작)에 누워서 잠을 자고, 쓴 쓸개를 맛보면서 훗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손자가 객경으로 가서 벼슬(군사책사)을 했던 오나라와 그 옆 월나라와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뭐랄까요 두 나라는 철천지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이 같이 배를 타는 상황을 ‘오월동주’한다고 했습니다. 원수지간에 같은 배를 탔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와신상담은 그런 월나라와 오나라의 전쟁 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오나라 월나라가 전쟁을 합니다. 오나라 ‘합려’와 월나라 ‘구천’이 전쟁을 하는데 월나라의 합려가 전쟁터에서 화살을 맞아서 죽고 맙니다.

 

결국은 월나라 구천이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자 합려가 죽으면서 그의 아들 ‘부차’한테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나는 죽는다, 나대신 원수를 갚아줘야겠다. 얼마나 분해요. 경쟁국인 월나라한테 지고 자기는 화살에 맞아 죽으니까?

 

그러자 합려의 아들인 부차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버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고서는 부차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뭐를 한 거예요?

 

땔나무에 누워 잔 것입니다. 와신 한 것입니다. 어디에 누워 잠을 잤어요? 땔나무에서 누워서 잔 것입니다. 당연히 잠이 안 오겠죠. 그러면서 뭐를 생각한 것입니까?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입니다. 지금 안 되니 잠깐 피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차가 힘(역량)을 모아 월나라와 싸워 구천이를 이깁니다. 회계산 전투라고 중국 전쟁사 중에 유명한 전투인데 그 전투에서 부차가 구천이를 이겨서 아버지의 한(복수)을 풀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월나라 구천이 살아남아야 되니까 자기 옷을 다 벗고는 제발 살려달라고 부차에게 간청을 합니다. 그때 부차의 참모였던 ‘오자서’가 구천을 살려두면 안 된다고 합니다.

 

분명히 나중에 보복을 할 것이기 때문에 살려주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차는 저 정도면 이제는 다시는 까불지 않을 것이니 살려줍니다. 목숨을 부지한 구천이 십여 년 동안 복수를 하고자 이를 갑니다.

 

십여 년 동안 복수를 다짐하는데 어떻게 하냐면 쓸개를 맛보면서 이를 갑니다. 쓸개를 매달아놓고 매일같이 그걸 맛보면서, 내가 복수하겠다.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안 되면 잠깐 피하라.

 

손자가 주장했잖습니까? 내 힘이 약하면 엎드려서 내 힘(역량)을 키우라고, 그런 의미에서 쓸개를 맛보면서 구천이가 십여 년 동안 힘을 키워서 결국은 다시 오나라를 완전히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만듭니다.

 

오나라와 월나라 이야기에서 교훈적으로 얻은 것은 손자의 주장처럼 내가 힘이 안 되면 내 힘(역량)을 기르기 위해서 바짝 엎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럴 때 있잖습니까?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내 힘이 안 될 때 그냥 바짝 엎드려서 기다렸다가 역량이 되면 시작하지 않습니까?

 

다만 엎드려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해요. 힘이 모자라면 엎드려서 때를 기다리고 정 안 되면 유감없이 피하라고 합니다.

 

완전히 피해서 내 힘이 다시 길러질 때까지 그야말로 와신상담하면서 내 역량을 키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와신상담’ 한다는 말은 두 개의 행위가 합쳐져서 하나의 의미를 갖지만 원래는 별개의 사항입니다.

 

장작에 누어 잔 것과 쓸개를 맛보며 힘을 키운 것은 부차와 구천이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 다른 행위인 것입니다.

 

장작더미에 누워 잔 사람은 부차고 쓸개를 맞보면 생활한 사람은 구천입니다. 부처와 구천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 각각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냥 합쳐서 내 힘을 기르고 정말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내 역량을 기르기 위해 하는 노력, 그것을 ‘와신상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와신상담’ 해보신 적 있습니까? 살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전체적으로 겪은 경제 위기도 있었잖습니까? 결국 와신상담 자세로 어려움을 겪어 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내가 힘이 약해서 도망가거나 엎드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피하거나 하는 것은 절대로 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주장)을 합니다. 적과 나의 상황 속에서 적보다 10배, 5배, 2배 그리고 비슷할 때와 내가 힘이 없을 때, 완전히 안 될 때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故小必敵之堅 大敵之擒也(고소필적지견 대적지금야). 약한 군대가 적을 맞아 강하하게 수비를 한다면 강한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만다. 잡혀 먹고 만다는 뜻입니다.

 

손자의 주장(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조그만 적이, 조그만 적이라는 것은 약한 군대가, 쪼그만 놈이 지 잘났다고 탄탄하게 고집하는 놈은 결국은 큰(강한) 놈한테 잡혀먹는다. 고집 부리다가 당한다고 합니다.

 

자기 힘이 약한(없으면)것, 힘이 없다는 걸 인정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인정을 안 해요. 왜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야기 있잖습니까?

 

누구와 싸워서 한 대 얻어맞아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 그 다음 날 그 집 앞에 가서 기다립니다. 그리고는 또 싸워요, 그런데 또 얻어맞습니다. 내 힘이 약한데 얻어맞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자존심과 화가 수그러들지 않아 계속 맞으면서 또 대들고 해서 뭐 끝내는 오기로 이겼는데 자기 얼굴은 어떻게 됐습니까?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습니까? 필자는 이 회자되는 말을 곱씹어 보면 고집이다 뭐 오기다 등등 말을 하는데 그거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지 말고 한대 맞았으면 어떻게 해요 바짝 엎드려서 내 힘을 기르는 거죠. 찾아가서 내 힘이 안 되는데 고집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일 많지 않나요? 뭐 게임 같은 거 할 때도 도대체 상대가 안 되는데 지면 분을 못 참아 또 하고 또 하고 해도 결국은 그 고집 때문에 망해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손자는 마지막에서 이것을 강조하면서 이런 원칙을 말합니다. 열 배가 됐을 때, 다섯 배, 두 배일 경우 어떻게 하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시일 뿐입니다.

 

그렇게 대처했으면 좋겠다는 원론(칙)적 제안(시) 일 뿐입니다. 그 원칙이라는 것을 그대로 달달 외워서 이런 저런 상황에 대입해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섯 배 차이가 난다. 그러니 공격해라고 하는 것은 손자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자가 원하는 것은 처한 때와 상황에 따르고, 병력(능력)에 따라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 때 그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합리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주장)입니다.

   

내 힘(역량)이 열 배라고 다섯 배라고 두 배라고 달달 외워서 제시된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대처(대응)을 하라는 것입니다. 열 배라도 도망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보다 열 배인데도 도망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왜요? 그럴 이유가 있잖습니까?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 상황에 따라서 변(대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손자의 주장(결론)입니다. 필자는 오늘 각론 된 손자병법 중 제일 마음에 와 닿은 것은 10배가 됐을 때도 삥 둘러서 포위하고 기다려라. 그리고 상대방보다 내가 힘이 완전히 없을 때 그때는 도망쳐서 기다려라.

 

그러니까 아주 강할 때도 기다리고 아주 약할 때도 기다리란 말입니다. 필자는 여기서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강한 사람이 기다리는 건 강자의 여유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고 약한 사람이 기다리는 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기다림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1840년 아편전쟁 겪고 나서 서구 열강에 완전히 무너져 홍콩과 마카오를 90년 동안 내주고 기다림 끝에 되찾았잖습니까?

 

90년을 기다렸으면 꽤 기다릴 줄 아는 민족입니다. 우리도 용산 미군기지 한 100년 기다릴 자신 있잖습니까?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힘(역량)을 키워서 우리 후손들이 100년 뒤에 온전하게 다시 찾으면 되잖습니까?

 

안 될 때는 좀 기다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손자의 지혜를 각론하면서 그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필자의 가슴속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필자는 각론을 통해서 제 느낌을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의 느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모공편의 ‘후퇴도 전략이다’는 내용을 토파하면서 손자가 주장한 것을 태권도계 조직 핵심임원들이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 꼭 적용해 봤으면 합니다. 서로가 상생할 수 있도록 조직 핵심 임원들이 머리로 지식적으로 외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머리(지식)로 인식돼 몸속에 간직된 사고(생각)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표출하는 태권도인(조직임원)들이 됐으면 합니다.

 

손자병법 謀攻篇 ‘후퇴도 전략이다’에 대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18부에서는 “맡겼으면 믿어라”에 대해서 각론 합니다. 감사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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